항목 ID | GC086005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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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水原 崔氏 |
영어공식명칭 | Suwon Choi Family |
이칭/별칭 | 원최,수주 최씨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기도 화성시 |
시대 | 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권기중 |
본관 | 수원 - 경기도 수원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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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거|집성지 | 수원 최씨 집성지 -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 수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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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시조 | 최자성|최루백 |
최자성·최루백을 시조로 하는 경기도 화성시의 세거 성씨.
수원 최씨는 고려 때부터 중앙 정부에 진출하여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조선 건국 후에도 지역 사족으로서 관직자를 꾸준히 배출하였다.
수원 최씨는 크게 두 계열로 나뉘는데, 최자성(崔滋盛)을 시조로 하는 계열과 최루백(崔婁伯)을 시조로 하는 계열이다. 최자성은 『고려사』에 의하면 수주[수원] 사람으로, 호부 상서로 추증된 최유락(崔惟諾)의 아들이다. 선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로 보임되었다. 이후 인종 대에 여러 관직을 거친 후 특진 검교사도 수사공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特進 檢校司徒 守司空 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에 이르렀다. 1143년(인종 21)에 사망하였으며,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이자겸의 난 때 이자겸의 집에서 일을 보고 있었다 하여 당대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최루백 역시 『고려사』에 등장하는 인물로, 과거에 급제한 후 의종 대에 기거사인(起居舍人)·국자사업(國子司業)·한림학사(翰林學士)를 역임하였다. 아버지 최상저(崔尙翥)가 사냥 나갔다가 범에게 물려 죽자, 홍법산(弘法山) 서쪽에 장사 지낸 후 무덤을 지켰다.
이외에 고려 시대의 대표적인 수원 최씨 인물로는 산원동정(散員同正)을 지낸 최정(崔靖)이 있다. 조선 시대에는 총 23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는데, 호분위부사정(虎賁衛副司正)을 지낸 최천동(崔千童)과 첨정(僉正)을 지낸 최우경(崔遇慶)등이 대표적이다.
수원 최씨는 『세종실록지리지』에 토성으로 등장하는데, 16세기 전반까지 화성 지역의 유력 사족이었다. 다만 정확한 입향 경위는 알기 어렵다.
수원 최씨 시조 묘는 함경북도 명천군 아간면 황덕동에 있으며, 매년 양력 10월 9일 제사를 지내고 있다.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 의하면 경기도에 모두 4,755명의 수원 최씨가 거주하고 있는데, 그중 화성시에 거주하는 인구는 244명이다. 244명 중 봉담읍 수기리에 10호 정도가 모여 사는 것으로 알려졌다.
수원 최씨 관련 유적으로는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 최루백로 313-4에 있는 최루백 효자각이 있다.